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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김연수 작가의 <일곱 해의 마지막> 리뷰 감상문 :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란

by 이승보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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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_ 4.5

저자 : 김연수
출판 : 문학동네
출판일 : 2020.07.01

 

 

인상깊은 문구들

(p38)인생의 질문이란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인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원하는게 있다면 적극적으로 대답해야 했다. 어쩔 수 없어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었다. 세상에 태어날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러므로 그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설가 그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일 지라도.

(p112)바람이 불면 빛과 그늘의 경계가 흔들렸다. 그늘은, 빛이 있어 그늘이었다. 지금 그늘 속에 있다는 건,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에게 그 빛이 아직 도달하지 않았을 뿐. 

(p164)“숲이 비어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고, 폐허가 꽉 차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지요. 저는 모든 폐허에서 한때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시를 씁니다.”


(p189)누가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행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평생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자신만의 그 세계를.

감상문

 ㅅㅇ의 (강력한)추천으로 [일곱해의 마지막]  소설을 읽었다. 책의 내용과 감상을 얘기하기 전에 하루만에,7시간에 걸쳐, 책 한 권을 완독한건 마지막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않을 정도로 굉장히 오랜만이다. 마지막엔 출근의 압박과 졸음을 참으며 오기로 끝내긴 했다만 이 책을 끊어서 읽기보다는 한번에 읽어나간 것이 오히려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간 몇 년간 독서는 이동할 때와 같이 틈새시간에 쪼개서 읽는 습관이 들었는데 한번에 읽으면서 꼭지별로 간단히 정리를 하며 읽으니 훨씬 더 기억에 잘 남기도 하고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도 좋았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진행방식이 시간순이 아니기에 더욱더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은 소설이다. 작가의 말에 언급되었듯이 56년부터 다시 시(동시)를 쓰기 시작했다가 마지막 시가 발표되는 62년이후로 단 한편의 작품활동도 없이 30년을 침묵하다가 돌아가신 백석시인에게 7년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작가의 상상력과 백석시인의 작품들이 맞물려서 창작된 소설이다. 책의 제목은 일곱해,7년,이지만 소설 속에서 주되게 다루어지는 시기는 57~58년, 첫 시집이 나오던 30년대 중반, 그리고 일곱해의마지막인 63년이다. 글은 시간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않고 57년과 58년을  번갈아 교차하며 보여주고, 통영의 여인에게 마음을 주고 첫 시집이 나오던 20대와 40대후반이 교차하는 등 시간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기행의 모습과 생각을 나타낸다. 자칫 지금이 어느 순간인것인지 헷갈리기도 했지만 정확한 시점을 알려하기보다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듯이 기행의 생각과 상황을 따라가려했다.

 나는 김연수 작가와 백석 시인의 작품 모두에 무지했다. 이 책을 먼저 읽고 백석의 시를 몇 개 찾아 읽었다. 김연수 작가의 원래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설 속 묘사하는 부분이나 몇 장면들은 백석의 시를 닮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보통의 단어들로 상황을 묘사했을 뿐인데 먹먹하고 힘겨움들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 속에서 헤쳐나가려 하는 작은 의지가 엿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마지막 부분과 묘하게 겹쳐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소설 속 백석은 2022년 남한에 사는 나의 입장에서는 불행한 사람이다. 시집을 내고, 시골학교의 영어선생님을 하며, 두메 산골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책이나 읽는 것이 소망일 뿐인 사람인데 현실은 그렇게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북한 당의 사상을 찬양하는 시를 ‘써야만’ 했고, 문학성, 서정성 따위는 결코 비춰서는 안되는 글을 ‘써야만’ 했다. 결국 숙청을 당해 삼수라는 시골 조합으로 떠나야만 했을 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첫 시집인 <사슴>을 가지고 통영으로 내려가는 길에 친구 현이가 한 말과 같다. ‘이제는 영영 꿈같은 일이지 뭐야. 인생은 우리에게 왜 이다지도 혹독한 것인지. 우리의 삶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내 눈에 보인 기행은 떠나지 않았다. 싸우지도 않았고 시바이(연기하다)하며 살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생각들을 조심스레 얘기했고, 행동하고, 적었고, 때로는 수용하고 좌절하고 부딪히며 살았다.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순간순간 자신이 최선이라고 믿는 선택을 하고 행동을 했을 뿐이다. 다만 주변의 상황이, 북한이라는 현실이 암담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짓는 죄와 벌을 기행도 감당해야만 했을 뿐이다. 

 소설 속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세 가지로 추려진다.
 첫 번째는 그 당시(그리고 아마 지금도) 북한의 문학의 분위기(라기보다는 규정과 기능)를 처음 알게 된 장면이다. 이 정도까지 검열했단 말인가? 싶을 정도라서 약간의 충격이었다. 

기행의 시에 대해 아동문학분과에서 엄종석이 기행에게 얘기한다.
기린아,
아프리카 기린아,
~~~~
네 목에 깃발을 달아보자
붉은 깃발을 달아보자
~~~
”우리나라에 있는 곰이나 범을 두고, 왜 머나먼 아프리카의 기린을 끌고 와 붉은 깃발을 다느냔 말이오?”
”동무는 우리의 서정이란 우리나라 아동들의 실지 생활감정에 의거해야만 한다는 당의 창작 지침을 여태 이해하지 못하겠소? 아프리카의 기린이라면 거기다가 붉은 깃발을 달든 푸른 깃발을 달든 무슨 상관이오. 우리의 동물이어야 붉은 깃발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두 번째는 혜산에 처음 도착했을 때 진서희에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를 듣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상반된 두 가지를 동시에 느꼈다. 순수하게 시를 창작하고 단어 하나하나를 사랑할 때의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대비되어서 암담한 현실을 깨닫고 좌절하는 기행과 잊고 살던 그때를 다른 이로부터 들으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며 어떠한 의지를 가지게 되는 기행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나는 전자의 모습이 좀 더 와닿았기에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특히나 이 장면에서 나오는 구절들은 꽤나 인상 깊었다.
 

”말씀 안하셔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왜 삼수까지 오셨는지 말입니다”
서희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혜산역 대합실 한켠에서, 어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선한 표정으로 그녀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나린다”라며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런 곳에서,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시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니 그의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여학생 시절, 국어 선생을 따라 외웠다는 그 시의 한 음절 한 음절은 쇠도끼 날처럼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 기행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아니 비로소 그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이랄까. 타오르는 갈탄의 힘으로 한쪽 표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난로며, 좀체 귀에 와닿지 않는 변방의 사투리며, 도내에서도 손꼽히는 축산반을 자랑한다는 협동조합을 찾아간다는 사실 등등이 모두. 그때 그는 눈이 푹푹 나리는 밤 안에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안에 있었다. 그 밤과 마음이 지금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채 한참이나 대합실 바닥을 내려다봤다. 미래나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와 시골 사람들의 솜 신에서 녹아내린 물로 바닥이 검게 물드는 혜산역 대합실에 떨어진 사람처럼, 멍하니. 
”그 시에 이미 쓰지지 않았습니까?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이런 세상이 나타난 것일까? 자신은 다만 시를 한 편 들었을 뿐인데.. 그나마 오래전 자신이 쓴 시였는데..기행은 가만히 서서 푹푹 나리는 눈을 맞으며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아 대는 흰 당나귀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세 번째는 한 권의 책을 하나의 세계에 비유하며, 당에서 반당 반혁명 작가들의 책을 불태우는 것에 대해 기행이 생각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그냥 비유 자체가 마음에 들면서 머릿 속에서 하나의 세계인 책들이 현실인 세상과 그것이 불타 없어지는 장면들이 이미지화가 너무 잘되어서 마음에 들었다.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애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여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현실은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내가 읽은게 맞다면 소설 속에서 기행을 ‘백석’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단 3번 뿐이다. 심지어 그 중 한 번은 흰돌 동무라고 불리운 것이며, 한 번은 처음 시집을 내었다고 얘기되는 장면에서 ‘백석 시집 사슴’ 이라고 적힌 부분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누군가에게 ‘백석’이라고 불리운건 진서희가 처음 기행을 만나서 ‘백석 선생님 아니신가요?’라고 묻는 부분 뿐이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을 나는 시인 백석이 아닌 사람 백기행의 모습과 생각을 그려낸 것이라고 느껴진다. 시인이 아닌, 시인이었던, 시를 쓰고 싶은, 사람 백기행. 그런 점에서 56년 이후 시인 백석은 불행했을지언정 사람 기행은 자유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상허의 말처럼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볼 뿐 거기에 뭔가를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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